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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문 혜림 여사 (대담)
글쓴이:상담센터 날짜: 2011.09.21 15:59:10 조회:8403 추천:0 글쓴이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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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문 혜림 여사 (대담)

글쓴이: 배임순 날짜: 2002.10.14

  1936년 커네티컷에 있는 장미농장의 막내딸로 태어나 세계적인 신학자 문동환 박사님께 시집가서 삼십여 년을 한국에서 지내신 페이(본명) 문 여사!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이며 한국인을 위하여 헌신하신 문혜림 사모님!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남자인 문 박사님과 만나게 되셨나요?  

문혜림: 하드포드 신학교 캠퍼스에서 만났어요 나는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고 그이는 기독교교육학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을 때였지요. 그 사람이 내눈에 들기 시작한 것은 여름이 채 지나지도 않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서는 어느 날 오후, 저녁식사를 하려고 친구들과 식당을 향해 가는데 몇몇 학생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는 그 사람이 눈에 들어왔어요. 약간 마른 듯한 큰 키에 검은머리, 매끈한 갈색피부, 유난히 검고 커다란 눈, 첫 눈에 호감을 느꼈답니다. 그 동양인 남자가 누굴까? 그 날 이후 문득문득 이름도 모르는 그 남자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어요. 며칠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어요. 언젠가 들어 본 듯한 아름다운 선율이 가을의 저녁노을을 타고 흐르는데 소리나는 쪽을 향해 나도 모르게 가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피아노 소리가 멈출 때까지 홀린 듯 하늘을 보고 있었지요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 어떤 남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오는데 바로 그 사람이 전에 공놀이하던 남자였어요. 나는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지요. 나중에야 그때 그 연주했던 피아노 곡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학교 캠퍼스를 오고가면서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면’ 했는데 어느 날 아침 식당에서 마주치게 되었어요 “페이, 같이 산책이나 할까요?”하고 그 사람이 말을 걸어 왔을 때 얼마나 좋았던지... 그리하여 우리는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요. 

배임순: 아!,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 박사님은 사모님보다 15살이나 연상이라고 알고있는데 그때 나이를 알고 계셨습니까?

문혜림: 동양인들은 서양사람에 비해 피부가 좋기 때문에 주름살이 거의 없었고 그 사람이 나이를 밝히지 않아서 삼십대 초반이거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친구가 “페이, 너 도대체 스티브의 나이를 알고 있기나 한 거야?” 하고 물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 삼십대 초반이겠지 뭐.” “뭐, 삼십대 초반. 이 멍청아, 그 사람은 서른 여덟 살이야.” 그럼 나와는 자그마치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내가 태어날 때 그는 중학생이었던 셈이에요. 그러나 어쩔 수 없었어요. 우리가 헤어지기에는 정이 들대로 들었거든요. 오히려 교수들이 그 사람에 대해 대단한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철부지인 나를 밀어내려고 애를 썼어요. 주위 사람들 때문에 우린 몇 번이나 헤어질 뻔했지요.  

배임순: 마음 많이 졸이셨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나요?

문혜림: 그이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변의 반대와 한국에서 부딪쳐야 할 편견들을 극복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제게 청혼을 했어요. 정말 기다렸던 일이었지요. 그러나 결혼을 하면 한국으로 가야하는데... 나는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이는 졸업 한 후 “기다리겠어. 당신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하고는 한국으로 돌아 가버렸어요. 그이가 떠난 후, 서울 YWCA를 통해 뒤 따라 갔지요. 한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형님 내외는 나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는데 “한 달에 한 번도 고기를 못 먹는 나라에 와서 어떻게 살 수 있겠어?”하며 반대하셨어요. 그리고 음식도 제 입에 맞지 않고 한국어를 배울 자신도 없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나, 나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되면서 모든 것을 그이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가서 결혼하게 되었어요. 그때 한국사람이 될 각오를 했지요. 

배임순: 말로만 듣던 사랑의 힘! 그 힘이 엄청납니다. 미국 사람을 한국사람으로 언어뿐 아니라 의식까지 바꾸어버렸네요. 이렇게 남편만 믿고 결혼해서 낯선 곳에서 살게 되었는데 남편이 두번이나 감옥에 갔으니 그때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문혜림: 우리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가깝게 밀착된 부부였고 지나치게 의존적 이였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힘들었어요. 재판이 끝나고 그가 수감된 후에는 마치 시끌벅적한 장례식을 치르고 난 과부처럼 허전함이 밀려왔어요. 하루는 남편면회를 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심한 분노감까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어요. 민족을 위한 자기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던 그가 존경스러웠지만 마음한 구석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나를 분노케 했어요. 자기만을 믿고 행복을 꿈꾸며 한국으로 시집온 나를 내버려두고 감옥으로 간 남편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내가 처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수감자 아내들과 함께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V 자모양의 숄을 짰습니다. 색깔은 보라색이었는데 보라색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부활하기 전 고난 당하는 기간을 상징하는 색깔이에요. 그리고 그동안 미국연합장로교회 전국여신도대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수천 명의 미국여성들 앞에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내가 입고간 남편의 수감 번호가 적힌 보라색 원피스와 빅토리아(v자모양)숄을 소개하기도 했어요. 이 숄을 하나 완성하려면 코바늘로 정확히 만 번을 떠야 합니다. 이 숄을 선물할 때는 만 번의 기도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예요. 처음에는 선물로 쓰여진 것이 나중에는 팔기도 했어요. 그동안 아이들도 많이 외로웠어요. 

배임순: 아버지가 없는 동안에도 자녀들을 잘 기르셨네요 그 아이들이 여기 사진 속에 미남 미녀들이군요. 그런데 막내딸은 생김새가 영 다른 것 같습니다.

문혜림: 당시에 많은 고아들이 거리에 버려지고 있다는 소식이 자주 신문에 보도되었어요. 남편과 나는 국내에서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기 때문에 외국으로 보낸다는 기사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어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고아 한 명씩만 입양한다면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지 않아도 되고 고아원도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라고 하셨는데 우리부터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 시립아동 병원에서 여자아이를 데려왔어요. 이름을 우리아이들의 돌림자를 따서 혜영이라고 지었어요 

배임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핏줄을 절대시하는 한국인들에게 핏줄을 알 수 없는 남의 아이를 데려다 키운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힘든 점이 많았을 줄 압니다만 특별히 힘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문혜림: 이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었던 것은 핏줄이 아니라 주변의 높은 편견의 벽이었습니다. 당당하고 자신감에 찬 아이로 키우는 것은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언젠가 밝혀질 수밖에 없는 입양 사실을 아이가 받을 충격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동네에서 듣고 들어온 거예요. 그때 혜영이가 7살이었는데 어린것이 울면서 그게 사실이냐고 묻는데 미리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자기를 미운 오리새끼라고 표현할 때는 가슴이 아팠어요. 

배임순: 한국에 살면서 정말 힘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기지촌에서 여성들을 위하여 '두레방' 운영도 하셨다는데 '두레방'은 무엇이며 어떤 취지로 시작이 되었습니까?

문혜림: '두레방'은 옛날 시골에서 서로 도와가며 일하는 공동체를 ‘두레’라고 하잖아요. 서로 돕고 이야기하는 곳이라는 의미예요. 그곳은 이 땅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삶을 살고 있는 기지촌 여성과 국제 결혼한 여성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도움으로써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해방하며,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 두레방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많은 여성들을 만났어요 가족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아가씨는 미국 인디아나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에게 매달 돈을 보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그 외에도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많아요. 

배임순: 한국을 위하여 많이 애쓰셨는데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집이 자그마해서 두 분이 오손도손 지내시기 알맞은 것 같습니다.

문혜림: 친정 부모님들이 살던 집이 있는데 둘이 살기엔 너무 커서 일부러 작은 집을 싼값에 샀어요. 그리고 남편이 수리를 했어요. 이 가구들은 모두 그라지 세일에서 산 것이지요.  

배임순: 남을 위하여 그토록 헌신하면서 박사님 내외분의 검소한 생활모습에 또 한번 머리가 숙여집니다.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문혜림: 얼마 전까지 뉴욕에 있는 무지개의 집에서 상담하는 일을 도왔어요. 그곳은 미국에 이민 온 한국여성들이 상처받기도 하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시고 뉴욕거리를 헤매거나 갈곳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곳이었어요. 교통문제도 있고 해서 지금은 방가 후 부모가 집에 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어요. 

배임순: 사모님을 만나 뵙고 저의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확실한 목표가 서는군요. 상처받은 영혼 위해 한평생을 살아오신 사모님께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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