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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기 사랑 노트 - 아버지라는 이름
글쓴이:상담센터 날짜: 2022.12.01 16:50:48 조회:1780 추천:0 글쓴이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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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자기 사랑 노트 - 아버지라는 이름, 10년 만의 귀향 P144 - 149 Dec 2022

아버지라는 이름, 10년 만의 귀향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만에 나는 힘든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 왔다. 열다섯 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 있으면서 나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지나간 내 삶의 모든 순간 순간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만감이 교차하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스무 살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던 내가 마흔이 넘은 중년이 되어 다시는 오지 않겠다던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돌아 가신 후에 영전에서야 대할 줄 알았던 팔순의 아버지를 곧 이제 만나볼 터였다.

공항에 내릴 때 까지 나는 흥분제를 잔뜩 먹은 사람처럼 가슴이 콩콩 뛰었다. 출구를 빠져나오며 멀리 뒷전에 서 있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단숨에 달려가 아버지를 화들짝 끌어 안았다. 가슴 벅찬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아버지는 애가 외국 가서 오래 살았더니 별 이상한 짓을 다 하네..” 하며 주춤 물러 섰다. 나는 두 팔로 더 힘차게 아버지를 껴 안으며 아버지의 볼에 정신없이 입을 맞추며 아버지 귀에 속삭였다.

아버지, 너무 너무 뵙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아버지.

내 가슴속 깊숙이 숨어 있다가 터져 나온 사랑해요, 아버지;라는 이 한마디는 바로 나를 살게 한 외침이었다.

지금까지 왜 아버지는 내게 사랑 한다는 그 말 한마디 해주지 않으셨을까?물으며 원망의 세월을 살아 왔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 아버지를 끌어 안을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안 것이다. 아버지를 마음으로 안고 난 뒤에야 아버지가 말로 표현 하지 못했던 그 큰 사랑도 느낄 수 있었다. 팔순이 다 된 노구에도 살아 계신 아버지가 참으로 고맙고 감사 했다. 나는 속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살아계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공항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는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10년전에도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었다. 10년 사이에 바뀐 것은 고국의 강산만이 아니었다. 힘없고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만이 아니었다 . 바로 나 자신이 180도 바뀌어서 다시 그 자리로, 원망과 포기 그리고 두려움으로 울음을 쏟던 그 자리로 돌아 온 것이다. 10년 전 그때 8월의 햇살은 뜨거웠고, 차창 밖의 모든 것들은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사람과 나무 뿐 아니라 보도 블록과 건물들 마저 뜨거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마치 그 뜨겁고 지친 여름의 풍경에 눌리기라도 한 것 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가면 어찌 살 거냐?침묵을 깬 사람은 아버지였다.

공부 할 겁니다.짧게 답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언제 돌아올 거냐?

공부 끝나면요.

그게 언제 쯤 인데

가 봐야죠.

아버지는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아버지도 더 이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나이 서른에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말이 유학이지 사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 오지 않으리라 그런 다짐을 하고 있었다. 한국은 잊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나라였다. 도저히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곳이었다.

공항 로비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께 마지막 큰절을 올렸다. 사춘기를 넘어 서면서 서먹해진 부지간에 애틋함이 남아 있을 리 없었지만,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뵌다. 다음에 뵐 땐 영정 앞에 인사하게 될 거다라고 생각하자 강한 전율이 몸을 휘감더니 이내 눈물이 되어 뚝뚝 떨어 졌다. 몸을 일으키며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버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렇게 당당하고 위엄 있던 아버지그러나 이제는 수염마저 하얗게 쇠어버린 늙은 몸이 되어 종이 자락 구겨 지듯 내 품에 들어와 안겼다. 자꾸 눈물이 나서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놓기가 무섭게 가방을 움켜쥐고 공항 개찰구 안으로 달려 갔다.

배웅을 나왔던 친구들이 당황해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여권 심사대 앞에 서서야 마음을 놓고 엉엉 울었다.

안녕히 계세요. 잘들 있어라.입속말로 수없이 인사를 했다.

살아서는 다시 뵙지 못 할겁니다. 아버지, 부디 몸 성히 안녕히 계세요.

비행기에 앉았다. 이륙하는 비행기의 반등으로 몸이 끌려 내려가는 것 보다, 내 유년과 청년의 기억들이 나를 더 무겁게 끌어내렸다. 아스라한 구름 뒤로 가라 앉고 있는 고국의 땅, 그리고 그 땅 위에서 펼쳐졌던 시련의 기억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이 땅에서 떠나게 만든 아버지라는 존재

그리고 10년 후, 나는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상담학을 전공해서 학위를 받고 미국심리치료협회의 임상 감독 회원이 되어 있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치료와 가족 치료 전문가, 그리고 국제 공인 부부 치료 전문가 자격도 가지고 있다. 심리 상담이 일반화 되어 있는 미국에서라면 꽤 고액을 벌 수 있는 상담가인 셈이다.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은사님의 부름을 받은 직후였다. 한국의 많은 가정이 깨지고, 부부들이 이혼하고, 젊은 목회자들이 방황 하는데, 그들을 붙잡고 치유해 줄 준비된 전문가가 너무 없어! 오 박사가 지금까지 그런 처절한 고통과 치유의 경험을 하고 상담과 심리 치료를 공부한 것은 한국의 가정과 교회를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야!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나를 부등켜 안고 울어 주셨던 은사님이 나를 불러주셨다는 데 감격했다.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 초청을 받았을 때 내가 한국에서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 그런 일이 있기나 한 것인지 확신이 들지 못했다. 더욱이 다시는 돌아 가지 않겠다고 작정하며 떠나왔던 고국이 아닌가!

타국 생활 10년 만에 비로소 내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서 편안하고 조용한 삶을 살아 가려던 나로선 예전에 없던 한국으로의 귀국이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가지고 가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허락 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렇게 나는 내가 고향의 편안한 품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의 패치 아담스가 무료 병원을 만들었던 것처럼, 누구나 마음 편하게 찾아와 자신의 상처를 털어 놓을 수 있는 치유 쎈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고, 위기에 처한 사람이라면 같이 두려움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필요 하다. 많은 경우, 고통의 진짜 이유는 고통스러운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 고통을 나눌 사람을 한 명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절대적인 외로움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상담 쎈터가 필요한 이유였다.

잘 들어 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운이다. 잘 들어 주는 것이야 말로 관심의 가장 깊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사랑으로 그냥 들어 주는 것은 청산유수 같은 백 마디 말 보다도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지난 10년간의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뼈저리게 체득할 수 있었다.

고통이 공감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고백하게 된다. 꽁꽁 담아두었던 분노와 원망을 털어냄으로써 고통은 평화와 기쁨, 겸손과 감사, 희망과 생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상담가의 난 당신 맘 다 알아요라는 말 한마디,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의 치유가 시작되게 한 한마디이기도 했다. 니 또한 상담이 있을 때 마다 내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이렇게 기도 했다. 이제 상담하게 될 그 사람의 고통을 내 가슴에서 느끼게 해 주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다 주어서라도 이 사람의 고통이 덜어 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집중하면 치유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고국의 부름이 있은 후 나는 비로서 이러한 상담 쎈터를 통해 상담 볼모지 한국에 영성 /상담/ 치유 공동체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하기 보다는 내실 있게, 화려하기 보다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따뜻하고 적극적이고 열린 마음을 갖춘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 힐링카페, 상담 도서관, 조이 클리닉, 춤 치료 쎈터, 가족 치유 연구소, 가족 /부부 상담 쎈터등 누구나 마음을 열고 한 가족처럼 마주하는 힐링 네트워크의 꿈, 그것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사랑 함으로써 서로를 소중히 받아들일 수 있는 가정과 사회에의 꿈이기도 했다.

엎드려 있는 나의 등 뒤로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를 다시 한국으로 부른 것은 은사님만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아직 살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그 말, 아버지와 나는 이제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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