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무엇을
허락 할 것인가?
“카린을 죽인 것은 나야.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카린은 죽지 않았을거야. 내가 문제야. 그래서 떠나는거야.” 패치는 자신이 만든 병원과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면서 친구에게 말을 잇는다.
“사람이 선하다고? 사람의 선한 면을 도와주면 좋은 사람이 될 거라고? 웃기지마. 그런 건 없어.” 자신의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기 시작한다. 페치가 처음 정신병원에 갔던 이유는 자살 충동 때문이있다. 자신이 밉고 싫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문제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이 찾아오면 ”문제님
오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제 마음의 왕좌에 앉으십시요” 하고 문제 그 자체를 자신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자신은 사라지고
문제덩어리만 남아서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급기야는 자신이 없어져야 문제가 사라진다고 까지 믿게 된다. 그러던 그가 스스로의 주인이 됨으로써 병원을 벗어났는데, 다시 옛
패턴대로 문제의 노예가 되면서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시카고의 성폭행방지상담소에서 충격적인 보고서가 나온 적이 있다. 병원 원목이 조사를 해보니 입원한 중증 환자들의 상당수가 카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다. 원목이 좀더 세심하게 조사를 해보니 놀랍게도 그들 중 상당수가 “내가 성폭행을 당하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성폭한 사람을 용서 했을까?
제대로 된 상황 판단과 정단한 분노를 할 줄 모르면서 무조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나
한 걸까? 자신에 대한 사랑이 바탕에 깔리지 않은 채 잘못을 자기에게로만 돌리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행위와 같다. 문제 자체가 나의 주인이 되어버리면 나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게 된다.
문제인 자신만 잊으면, 자신만 죽어버리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듯,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용서하지 못한다. 자신을 향해 ‘괜찮은
사람’ 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괜찮은 사람’ 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내 중심에 무엇을 두느냐. 나의 주인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모든 시각이 바뀌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 의식에 매여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 내가 기뻐야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쁠 수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 하고 만다. 패치는 카린이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자신이
기쁘게 생활하는 일임을 깨달으면서, 자신이 가장 기쁘게 생활하는 일은 또한 남들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떠오는 일임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웃음으로써의 진료를 시작한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그 즐거운 삶을
‘허락’ 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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