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현재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김정국
목사
기독교에만 있고 타 종교에는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두 기둥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이기에
그동안 수 많은 박해 중에서도 흔들림 없이 역사의 중심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신론 내지 반 기독교
국가에서 까지도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BC와 AD의 연대를
사용하고 있음을 봐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매년 3월
22일~4월 25이면
부활절을 맞는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 마른 뼈처럼 죽은것 처럼 될 삼라만상은 죽은것이 아니라 엄동설한을
견디느라 잠시 죽은 것 같이 보였을 뿐이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위대한 재생의 때를 노리고 잠시 땅
밑에 잠복하고 기다렸을 뿐이다. 여기서(자연) 우리의 부활의 교훈을 받게 될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설교(요5장)에서 두 가지 부활을 듣게 된다.
“내가…..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4절) 계속해서
“죽은자들(믿지 않는자)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믿는자)는
살아(부활)나리라”(25절)고 하셨다.
믿음으로 얻는 생명이 곧 사망에서 생명(부활)으로 바뀌어 놓았다는 말씀이다.
이 설교는 보이지 않는 영의 부활을 말씀하셨다. 보이지 않는 영의 부활은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이루어 진다.
그 다음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28, 29절)고 하셨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몸의 부활이다. 무덤에 있는 자도 다시 오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한다는 말씀이다. 재림
때 무덤에 있던자는 신 불신 간에 모두 부활한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부활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의 엄청난 차이로 나타난다. 생명의 부활에 참예한
자는 천국으로, 심판의 부활에 참예한 자는 지옥으로 나눠진다는 말씀이다.
필자는 가끔
‘일생이사(一生二死)’요
이생일사(二生一死)’란 말로 성도들에게 알린다. 기독교의 생사관이 담겨진 말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二生)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불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다. 거듭남의 뜻을 모르던 그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 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4절)라고 했다. 거듭남의 진리를 모르는 자는 부활의 참 뜻을 알리가 없다. 인간의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의
결정의 기준은 부활의 유무로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9장에 도르가(히, 다비다)란 여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의 신앙에 기초한 가치관을 선행과
구제라는 단어로 타나내고 있는데, 그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36절)고 했다. 도르가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특징인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2:44,
4:32)라는 공유경제를 몸소 실천한 여성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도르가는 나사로와
함께 육체의 부활을 체험한 자였다. 그 후 남은 여생을 전보다 더 많은 선행과 구제를 시행하면서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가 살 던 곳에 묻힌 무덤에서 지금도 재림을 기다리며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을 믿는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심히
많이 했던 도르가의 믿음이 부활의 의미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2019년도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도 도르가처럼 살다가 부활에 참예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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